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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뉴스

`서울대 나와 좋은 직장 다니면 뭐해요? 자유롭지 않은 걸`

"서울대 나와 좋은 직장 다니면 뭐해요? 자유롭지 않은 걸"

[CBS노컷] 입력 2011.05.13 11:03



[특별기획 `힘내라 청춘`] ③ 서울대 졸업, 안정된 직장 버리고 자유찾아 귀농


[경남CBS 손성경 아나운서] 도전만으로도 칭찬받고, 실패하더라도 박수 받아야 하는 청춘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갑기만 하다.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너도나도 스펙에 목매며, 바늘구멍 같은 경쟁률을 뚫기 위해 현실의 높은 벽과 싸우며 좌절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 하지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는 청춘들이 있다. 경남CBS는 그런 청춘들을 만나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에 대해 들어본다. [편집자 주]

◈ 서울대 졸업, 청약저축 넣으며 안정된 생활

울산에서 평범하게 자란 조대성(35)씨가 처음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중학교 때다. 교회 학생부 활동을 하면서 라이벌 친구를 따라 여학생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기타와 피아노를 혼자 익혔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그는 누구나 하는 일보다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 취미삼아 했던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주변에서도 긍정적이었다. 클래식을 좋아하던 친구는 잘 할 수 있을꺼라며 용기를 북돋아 줬고, 평소 성가대 지휘자가 자유롭게 악보 보는 것이 부럽다던 아버지께서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기꺼이 지원해주셨다.

남들에 비해 늦게 시작한 음악 공부였기 때문에 음대에 가기위해서는 작곡을 공부해야했다. 서울대를 목표로 수능 준비는 물론, 피아노 연습, 작곡공부, 화성법, 시창청음 훈련 등 쉴 틈 없이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대 작곡과 이론전공 합격.

하지만, 그는 음악을 통해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잘 맞는 않는 옷을 입은 듯, 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전통음악과는 거리가 있었고, 음악과 관련된 이론은 음악에 대한 욕구를 채워줄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방황 아닌 방황이 시작됐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재즈동아리, 국악동아리, 밴드동아리, 선교동아리 등 10개가 넘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에너지를 쏟았고, 방학 때에는 엠티와 교회수련회에 빠져 지냈다.

학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성적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2002년 말,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친구의 소개로 한 영상프로덕션에서 일했다. 클래식 연주자들의 공연을 촬영해주고 DVD를 제작해주는 사업을 하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악장을 구분하는 음악 관련 일을 하다가 영상도 제작해보지 않겠냐는 사장님의 권유로 영상 제작을 배웠어요. 재밌었어요. 편집도 하면서 영상에 들어가는 배경음악도 직접 작곡해 넣었죠”

2003년 8월 졸업 후에도 그 곳에서 6개월간 더 일했다. 그 후 얼마간의 백수생활,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거쳐 2004년 7월 ‘아트센터 나비’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아트센터 나비는 SK소속 미술관으로 일반 미술관과 다르게 미디어를 다루는 곳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람과 상호 소통이 가능한 작품을 주로 전시했고, 그가 소속된 프로덕션팀에서는 이러한 전시가 가능하도록 기술적으로 지원, 감독하는 일과 전시회를 영상과 사진으로 촬영해 기록하는 일을 했다.

그는 6개월 인턴을 거쳐 2005년 1월 정사원이 됐고, 2009년에는 회사 조직 개편 때 팀장을 맡게 됐다.

◈ "끊고 끊고 또 끊고…끊는 연습을 하다보니… 어느새 농부"

2005년, 아트센터 나비에서 정식으로 일을 하면서 남들처럼 꼬박꼬박 저축도 하고, 직장생활 재테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보험과 청약저축 등에도 가입했다. 의미 있게 돈을 쓰고 싶어 월급의 일정부분은 남을 돕는데 쓰기도 했다. 서울 생활이 행복했고, 일도 제법 능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자유롭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삶을 방해 요소들은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책을 많이 보고, 생각을 하고, 사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면서 편하게 살아가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약 6년 동안 일을 통해 얻은 지식과 기술은 늘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는 내안의 힘, 철학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 같았죠.”

그 때부터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책을 찾아 읽었고 방해하는 요소를 찾아, 하나씩 `버리는` 연습을 했다.

먼저 식습관부터 바꿨다.

“친구가 채식을 시작하면서 보여준 다큐멘터리가 충격적이었어요. 한창 광우병 파동으로 시끄럽고 먹거리에 대한 경계가 심했는데,‘이대로 안 되겠다’싶더라구요.” 이 때부터 육식을 피하고, 채식, 유제품, 해산물만 먹었다.

이산화탄소를 줄이기 위해 자동차를 사지 않았고, 6년 동안 꼬박꼬박 모으던 청약저축도 그만뒀다.

그 후에는 직업을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도시에서는 일을 하면 할수록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는거에요. 미디어 관련 일을 하면서 늘 전기를 발생시키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저의 신념과 맞지 않는 일 같지 않더라구요”

농사를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작물을 키워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고,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으면 아무도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에서는 말렸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겠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육식을 하지 않는다거나 자전거를 타는 노력들이 주변의 격려와 동참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튀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서 더 외로움을 느꼈다. 도시에서 지속하기가 힘들다는 결론이었다.

2007년 5월 결혼한 그의 곁에는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이 있었다. 다행히도 아내 역시 생각이 같았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세 식구가 제 2의 새로운 삶을 살고자 다짐했다.

2009년 여름휴가를 이용해 충남 홍성에 있는“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찾아갔다. 8회 졸업생인 친구 남편의 도움을 받아 찾아간 홍성은 연고도 없는 곳이었지만, 다녀오고 난 후에는 농사에 대한 관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농사에 필요한 기술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농민으로 살아가는 철학을 함께 가르치고 있었어요. 인문학 수업을 통해 부족함을 채우고, 막연했던 농사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한달 생활비 30만원…농사 배우며 동네 합창단 지휘자도"

세식구가 홍성에 내려온 지 이제 1년 5개월. 지난해 3월 학교에 입학해 올해 2학년이다.

그가 다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전공부 생태농업과(2001년 설립)는 2년제 학교로 대도시 에 집중된 과도한 경쟁, 학력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농촌교육을 통해 일과 배움과 생활을 통한 전인교육, 지역 속에 뿌리를 내리는 공동체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학생 전원 기숙사 생활을 통해 친밀감을 형성하고, 수업료는 기숙사비를 포함해 한 학기 약 150~160만원 정도다. 졸업 대신 창업이란 말을 사용하고, 올해 제 8회 창업식을 가져, 지금까지 총 55명의 수업생을 배출했다.

현재는 1학년 8명, 2학년 6명, 교직원 10여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온 학생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농부의 꿈을 꾸고 귀농한 30~40대까지 다양하다.

수업은 농촌 흐름과 농사 일정에 맞춰 진행되고, 농촌일이 많을 때에는 현장 실습을 중심으로 한다. 오전에는 글쓰기, 역사와 교양, 일본어, 논.밭농사, 원예, 축산, 유기농업 기초를 배우는 교실 수업, 오후에는 논농사를 중심으로 텃밭에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한다.

그는 4월 초, 논.밭과제 논문주제를 발표했다. 1학년 때 농사 전반에 대해 배웠다면, 2학년 때는 자기가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정해 농사를 짓고 결과물 발표하기 때문이다.

그는 올 한해 논과제로 500평 논에 ‘추청’이라는 품종을 심어서 재배할 계획을 세웠다. 밭과제는 고추(대화초, 토종종자)를 심어 세밀화로 그려볼 생각이다. 그리고 요즘 농촌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소(일하는 소) 만들기를 논문주제로 택했다. 최근에는 일소의 코 뚫는 작업을 했다.

지금은 특정 수입이 없다.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시간을 따로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비하지 않으면 농촌에서는 돈 쓸 일이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한 달에 30만원 정도 써요. 쌀값과 기저귀, 기름 값... 농촌에 사니까 먹거리 걱정은 안해도 되고, 돈 쓸 일이 없어요. 그리고 농촌에는 손이 가는 일이 많거든요. 비닐하우스를 짓는다거나 감자 캐는 일을 도와주면 일당 4~5만원 받는데, 그걸로 생활하고 있어요.” 올해는 저소득층 자녀에게 주는 양육비를 신청했고, 학원 강사 경력이 있는 아내가 일주일에 한 번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도 맡고 있다.

“사실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도 생계 때문이거든요.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돈, 꼬박꼬박 모아야하는 돈 때문인데, 저는 들어갈 돈이 없으니, 귀농도 쉬었고, 저축걱정을 안하니, 돈을 벌지 않아도 돼요.”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제가 준비된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학교를 보내고 싶지 않아요. 초등학교 들어가는 순간 교육의 완성은 대학인데, 아이가 어린 시절부터 마을에서 구성원으로 살 수 있는 의식을 심어주면 저절로 배우며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 역시 농사를 통해 가르치고 싶어요.”

올해 1월에는 작곡과 재능을 살려 마을에 ‘홍동뻐꾸기 합창단’도 만들었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뗀 아이부터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 농사 짓다 온 아주머니와 흰머리 가득한 할머니까지 땅거미가 지는 매주 월요일 저녁 8시면 홍성여성인농업센터에 모인다. 세대를 아우르는 20명 남짓되는 마을가족합창단이다.

“고향의 봄도 부르고, 오빠생각도 부르고, 가곡도 부르고 장르가 없어요. 농사일에 바쁘게 지내다 보면, 노래를 불러볼 기회도 많지 않은데, 노래하는 이 시간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노래만 해도 일체감을 느끼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굳이 정해진 룰에 맞춰 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 마을 행사가 있으면 “홍동 뻐꾸기 합창단”이 무조건 참가할 예정이다.

그는 과거에 비해 지금 너무 행복하다. 흙을 파면 팔수록 좋고, 심었을 때 자라나는 생명을 보면 경이로움도 느껴진다.

“이제 막 시골에서 농사 배워 시작하는 단계인데, 앞으로 농사는 최소한의 먹을 것만 지어서 먹고, 남은 것은 이웃과 나누고 살고 싶어요. 그리고 마을의 자잘한 일도 도우면서 제가 가진 재능을 나누고, 화폐 없이 품앗이로도 생활이 가능한 ‘신뢰가득한 마을’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자연과 더불어 모두가 가난하게 사는 삶, 지나친 것을 욕망하지 않고 사는 마을, 그런 마을이 우리 마을이 되도록 농사짓는 것이 그의 꿈이다.
sskann08@

출처:노컷뉴스